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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Multilateralism)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푸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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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션(The Martian)〉, 혹시 보셨나요?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를 구하기 위해 NASA가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던 순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미국의 보급선 발사가 실패하면서 구조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죠.
그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손이 내밀어집니다. 중국 국가우주국(CNSA)이 자신들의 로켓을 내주겠다고 나선 거예요.

이 장면이 마음에 남는 건, 단순히 "구조에 성공했다"는 감동 때문만은 아니에요.
서로 경쟁하던 강대국들이 한 사람을 살리려고 기술과 자원을 선뜻 내놓는 모습, 그 안에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우리는 보통 국가 안에서 살아갑니다. 국내에는 경찰도 있고 법원도 있죠.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처벌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있고요.
그런데 국가와 국가 사이는 어떨까요? 세계정부도 없고, 국제 경찰도 없습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을 강제로 체포할 존재, 사실 어디에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그냥 힘센 나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무법지대일까요? 다행히, 완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다자주의예요.
쉽게 말하면, 여러 나라가 공동의 규칙과 원칙을 바탕으로 협력하는 방식입니다. "내 나라 이익만 우선하겠다"는 일방주의(Unilateralism)와 달리, 서로 다른 국가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고 지키려는 태도에 가깝죠.
다자주의 vs 일방주의, 무엇이 다른가
다자주의
여러 나라가 같은 테이블에 →
공동 규칙을 함께 만들고 →
서로 지키기로 약속
일방주의
내 나라 이익이 먼저 →
다른 나라 사정은 뒷전 →
협력보다 각자도생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다자주의 속에서 매일을 살고 있어요. 눈치 못 채셨을 뿐이죠. 해외여행 갈 때 쓰는 여권 체계, 국제 항공 규정, 감염병 검역 시스템, 인터넷 통신 규약까지 다 국제 협력 위에서 굴러갑니다. 팬데믹 시기 WHO 발표 하나에 전 세계가 동시에 반응했던 것도 마찬가지고요.
기후위기나 AI 규제 같은 문제도 한 나라만 잘한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어느 나라 공장에서 나온 탄소는 결국 지구 전체의 온도를 바꾸고, 한 나라에서 개발된 AI 기술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니까요.
그래서 유엔은 다자주의를 단순한 외교 기술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세계에서 함께 생존하기 위한 '국가 운영 기술이자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 영상 준비중출처: 선학평화상 공식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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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자주의가
만들어졌을까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만들어진 '지구 운영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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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는 원래부터 있던 개념이 아니에요. 오히려 인류가 처절하게 실패한 뒤에야 겨우 얻어낸 교훈에 가깝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어요. 왜 인류는 이렇게까지 파괴되었을까. 강한 나라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세계를 계속 두면,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출처: UN (1945년 창설된 유엔은 다시는 세계대전 같은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지구 운영 시스템'에 가까웠습니다.)
그 질문 끝에 탄생한 게 바로 유엔(UN)입니다. 단순한 국제 친목 모임이 아니었어요. 이후 WHO(세계보건기구), WTO(세계무역기구), UNICEF 같은 국제기구들도 줄줄이 만들어졌죠. 한마디로 다자주의는, "힘센 나라 마음대로 하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만든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다자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나
조약·협약·국제 규범
중재·협상·감시·검증
기후·감염병·해양·난민
평판·제재·외교적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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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지금
다자주의가 흔들릴까요
미국 리더십 약화, 미중 규칙 경쟁, 힘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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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금 이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세계는 다시 "함께 규칙을 만들자"보다 "각자 살아남자"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세계를 붙잡아 주던 기둥 세 개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기둥, '질서를 관리하던 미국'이 흔들리고 있어요.
한동안 세계는 미국이 만든 질서 위에서 움직였습니다.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달러라는 국제 공용 화폐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주심' 역할을 해왔죠.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미국 내부의 정치적 분열이 심각해지고, 막대한 국가 부채 문제까지 커지고 있어요. 세계 질서를 관리해야 할 나라가, 정작 자기 살림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죠.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을 앞으로도 계속 믿어도 되는 걸까?"
두 번째, 미국과 중국이 아예 '규칙' 자체를 두고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 함께 규칙을 만들자"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누가 그 규칙을 정할 것인가"를 두고 싸우는 쪽에 훨씬 가까워졌어요. 반도체와 AI, 공급망, 금융, 군사, 외교까지... 거의 모든 영역이 그 경쟁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조금 쉽게 비유하면, 한 반에 반장이 둘 생긴 상황과 비슷해요. 원래는 모두가 같은 규칙을 따랐지만, 이제는 두 반장이 서로 다른 규칙을 주장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편이 갈립니다. 공동 규칙보다 "누구 편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거예요. 지금 국제사회, 딱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험한 변화는 따로 있습니다.
국제 규범보다 힘이 우선하는 세계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에요.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죠. 국제법은 분명히 침략 전쟁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규칙보다 군사력이 먼저 움직였어요.
"국제 규범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국제사회가 은근히 믿고 있던 이 전제가, 크게 흔들린 겁니다.
경제 분야는 어떨까요?
예전에는 금융 시스템이 비교적 중립적인 영역처럼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금융 자체가 국제정치의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달러 결제망 접근 차단, 해외 자산 동결, 첨단 기술 수출 제한 등이 그러한 조치들입니다.
국제기구의 한계도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중요한 국제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막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회의와 선언은 계속되는데,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거죠. 지금 세계는 '룰은 남아 있지만, 룰을 믿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계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건 언제나 힘없는 쪽입니다.
2026 세계경제포럼(WEF)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 따르면
냉전 종식 이후 최다인 36개국에서 61개의 분쟁이 진행 중이며,
분쟁 위험 지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수준입니다.
다자주의의 위기가 곧 미래의 평화까지 이어지는 문제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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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2026 다보스의 메시지 — '대화는 전략적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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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세계경제포럼은 '대화의 정신(A Spirit of Dialogue)'을 핵심 주제로 내세웠습니다.
다자주의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면,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국제사회는 결국 "각자도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걸까요?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요. 다자주의는 위태롭지만, 아직 국제사회가 협력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최근엔 다자주의를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복구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바로 2026 세계경제포럼(WEF)이었어요.
핵심 주제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화의 정신(A Spirit of Dialogue)'.
세계경제포럼은 분열된 세계에서 이제 "대화 자체가 전략적 역량(Strategic Capability)"이 되었다고 선언했어요. 예전엔 대화를 외교적 예의나 이상주의쯤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그게 생존 기술이 되었다는 뜻이죠.
지금 세계가 마주한 문제들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감염병, 기후위기, AI, 사이버 안보, 공급망 붕괴 어느 한 나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결국 서로 경쟁하더라도, 최소한의 협력은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다보스 특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대자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굉장히 현실적인 말이죠. 좋아하는 나라끼리만 모여 대화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갈등하는 상대와도 대화를 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지금의 국제기구들이 완벽한 건 아니에요.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강대국 중심이라는 비판도 많죠.
그래서 최근엔 '미니래터럴(minilateralism)'이라는 개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한꺼번에 합의하기는 어려우니, 뜻이 맞는 몇몇 국가들이 먼저 손을 잡자는 방식이에요.
협력의 섬(Islands of Cooperation), 어디서 만들어지나
예를 들어 AI 규제, 반도체 공급망, 기후 기술, 감염병 대응 같은 분야에서 뜻이 맞는 나라들이 먼저 협력망을 만드는 거예요.
전문가들은 이를 "협력의 섬(Islands of Cooperation)"이라고 부릅니다.
세계 전체는 흩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꼭 필요한 협력만큼은 작은 섬처럼 연결되고 있다는 뜻이죠.
생각해보면 이거, 굉장히 인간적인 태도이기도 해요. 서로 완전히 좋아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대립하더라도, 적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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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자주의는
'대화의 습관'입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든 최소한의 생존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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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다자주의는 거창한 외교 기술이라기보다, 어쩌면 아주 인간적인 태도에 더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화를 끊지 않는 것. 규칙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약속은 지키려는 것. 그리고 결국, 누구도 완전히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딱 그 정도예요.
완벽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기술입니다.
우리가 서로 설득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거센 불신의 시대 속에서도 세계는 아직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을 거예요.
글. 최연제 국장
참고자료
1. United Nations, What is Multilateralism?
2. United Nations Charter, Founding Principles of the United Nations
3. World Trade Organization (WTO), Dispute Settlement System
4. World Economic Forum, Annual Meeting 2026: A Spirit of Dialogue
5. World Economic Forum, Global Risks Report 2026
6. Ray Dalio, Principles for Dealing with the Changing World Order — 저자 공식 자료(economicprinciples.org)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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